동학 인물 탐구data(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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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1-29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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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묶어낸 인물이 박인호였다.
그러나 전면적인 조직과 지휘계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주한Japan공사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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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데도 자식의 교육에는 소홀하지 않았다. 무뢰배들이 소값을 뜯으려 하면 막대기를 휘두르며 소를 끌고가 함부로 덤벼들지 못했다고 한다.
흩어진 농민군을 하나로 충청 해안지방 큰 지도자, 홍주성 전투 등에서 맹활약…손병희 이은 천도교 대도주
설명
내포평야는 곡창지대로 이곳의 양곡을 정기적으로 뇌물로 실어날랐는데 이 통로가 막혀 중앙에서 큰 우려를 자아내고 있었다. 박인호는 충청도 덕산 막동(지금의 예산군 삽교읍 하포리)에서 평민으로 태어났다. (이상재 증언)
순서
이런 그의 삶이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예산읍 오리장터 주막집 주인 박첨지에게서 동학 이야기를 들었다. 이곳의 어민․농민들은 남접의 지원이나 연계아래 해상통로를 봉쇄하고 있었다. 또 갈아먹을 농토도 없어서 글줄이나 배운 덕택에 의술이나 집터․묏자리 봐주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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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덕산장터에서 씨름판이 벌어질 적에 상으로 주는 소를 끌고가기가 일쑤였다.
다. 한편 정의(定義)감도 대단하여 동네사람들이 일을 당하면 이를 도맡아 처리하는 시쳇말로 해결사 노릇을 하였다. 박인호는 서당교육을 받으며 농삿일을 거들어야 했다. 1883년 29살의 나이로 동학에 입도하여 최시형을 찾아본 뒤 그는 형극의 길을 걸어야 했다. 특히 이창구가 이끄는 농민군은 내포에 진을 치고 서울로 통하는 조운선을 막고 주변 고을을 석권하고 있었다. 그는 때때로 가업을 꾸려가면서 동학의 수도에 열중했고 주변고을을 돌아다니며 포덕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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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해안 지방은 1894년 7~8월께부터 거의 농민군의 수중에 떨어져 있었다. 그의 아버지 영구는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을 꾸리는 전형적인 소작농이었다.
그는 씨름 뿐 아니라 술도 말로 마셨고 걸음도 빨라 용호도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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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동학교단의 지도자로 부상한 것은 1892년 광해문 복합상소때부터이다. 박인호의 성격은 온순했으나 힘이 장사였다.


